그들이 있어 고통 잊고 희망 일궈
그들이 있어 고통 잊고 희망 일궈
  • 대한급식
  • 승인 2010.12.2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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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스러진 별들

 

그들이 있어 고통 잊고 희망 일궈 2010년 스러진 별들

올해도 우리 사회를 이끌던 수많은 인물이 삶을 마감했다. 특히 성직자로서 본분을 넉넉히 지켜내 빛과 소금이 된 분이 적지 않다. 팍팍하고 고단한 현실을 건너는데 웃음을 안겨주고, 상처 받은 마음을 위무하고 포근하게 감싸준 대중문화인도 들어있다. 그들 덕분에 대중은 신산한 삶에 희망을 잃지 않고 잠시나마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 속에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聖者’
이태석 신부(48세)= 2001년 사제를 서품 받고 2008년 11월까지 아프리카 남부 수단의 톤즈마을에 병원·학교 등을 짓고 봉사활동에 매진했다. 하루 300명을 진료하는 의사, 교사, 브라스밴드 지휘자, 벽돌공, 공사장 일꾼, 그리고 성직자로 자신의 모든 재능을 세상에 내놓았다. 1987년 의대를 나와 광주가톨릭대를 거쳐 살레시오회에 들어갔다. 

‘무소유’ 가르치고 실천 
법정 스님(78세)= 가는 길도 ‘무소유’를 실천했다. 유지에 따라 스님의 법구(法柩)는 장례 절차 없이 연화대에 올라 흙과 바람으로 돌아갔다. 그 흔한 주지를 지낸 적도 없지만 족적이 뚜렷하다. 1970년대 후반 송광사 뒷산에 직접 작은 암자를 짓고 청빈을 영위했고, 서울 길상사에선 매년 봄과 가을 법회를 열어 끊임없이 대중과 교감했다.

사회악에도 의연히 맞섰다.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1993년부터 시민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이끌며 나눔과 생명사랑 운동을 펼쳤다. 생전에 무소유를 가르치고 실천하더니 열반에 들 때도 변함이 없었다. 수필집 <무소유>는 스테디셀러다. 

평신도 운동에 자발적 가난 추구
옥한흠 목사(72세)= 1978년 서울 서초동에 ‘사랑의 교회’를 개척해 현재 재적 교인 8만명, 출석 교인 4만5000명의 대형 교회로 키웠다. 평신도 운동과 ‘자발적 가난’을 추구했다. 때문에 한국 복음주의 교회를 이끄는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교회가 자신과 함께 늙어갈 수는 없다며 정년 5년 전에 담임목사 자리를 내놓아 교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서민들 애환 웃음으로 위무
배삼룡씨(84세)= ‘한국의 채플린’이다. 이른바 바보연기로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자서전 <한 어릿광대의 눈물 젖은 웃음>에서 ‘웃음은 남을 주고 한숨은 내가 갖는다’는 연기철학을 밝혔다.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1980년대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연예인 숙정대상 1호’로 지목돼 방송 출연을 정지당했다. 

유행가 선율에 대중정서 녹여
박춘석씨(80세)= 대중가요로 대중의 심금을 울렸다. 1954년 백일희의 ‘황혼의 엘레지’를 들고 작곡가로 데뷔했다. 특히 이미자와 콤비를 이루며 인기를 누렸다. 패티김 남진 정훈희 등 당대 스타가수의 대표작을 만든 ‘히트곡 제조기’였다. “음악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검은 뿔테 안경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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